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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앤비 특집] 국내 R&B 씬의 현주소, 그리고 희망Feature/케이팝 인사이트 2020. 5. 28. 21:04
200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케이팝과 R&B씬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국음악 전반에 R&B를 수혈했습니다. 케이팝이 하나의 글로벌한 장르이자 문화로 성장하는 동안 한국의 R&B씬은 어떻게 변모해왔을까요?
이에 대해 R&B 뮤지션 정기고는 더콰이엇, 팔로알토의 '국힙상담소' 에 출연하면서 "한국의 R&B씬이 아직 선명하게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이번 특집에서는 그가 내비친 R&B씬의 현주소와 전망을 놓고 음악산업 종사자와 함께 대담을 나눕니다.
- 호스트 : 안승배(IT회사 마케터, 전 로엔엔터테인먼트 근무, 이하 '안')
- 참여 : 원지훈(유니버설 뮤직 A&R, 이하 '원')
1. 현황
안 : 일전에 얘기 나누었던 것처럼 한국의 R&B는 이전에 비해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정기고가 '국힙상담소' 에서 했던 말처럼 씬이 아직 자리잡은 것 같지 않다는 말도 리스너들의 공감을 얻고 있어요. 온라인 댓글들에서도 보여지듯이 다들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지만, 한국 R&B가 포지셔닝 측면에서 애매한 위치에 있다는 느낌적 느낌들을 받고 있는 것 같거든요. 요컨대 케이팝과의 다양한 시너지를 통해 한국대중들의 R&B 수용도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과연 씬의 성장으로 전환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거죠.
https://www.youtube.com/watch?v=URlC7gz665s
(참고) 정기고가 '국힙상담소' 에 출연하여 얘기했던 것은 아래의 3가지로 요약된다.
(1) 몇몇 수퍼스타들의 성공이 있었지만, 이것이 씬의 자생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느낀다.
(2) 아티스트들은 다양해지고 있고 실력있는 루키들이 많지만 이들이 소개될 구좌는 제한적이다.
(3)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더콰이엇의 '랩하우스'를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
원 : 사실 초창기(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중반)에 미디어에서 정의하고 소비한 R&B의 이미지라는 것이 있잖아요? 소위 '소몰이' 나 그 외 감정을 한껏 담은 창법으로 꺾어서 부르는 대중가요라는 인식이 깊게 각인된 걸 무시할 수 없다고 봐요. R&B 를 떠올렸을 때 개념적으로 나얼, 김조한 등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지 프라이머리의 '시쓰루' 같은 음악적 특성이 떠오르지는 않는다는 거죠.
게다가 지금은 케이팝 자체가 R&B의 요소를 한껏 담고 있는 시대이기도 해요. 엑소의 세련된 R&B 튠에 딘(DEAN)과 디즈(Deez)의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장르음악 팬들의 입장에선 자이언티(Zion T), 크러쉬(Crush), 딘이 R&B 수퍼스타지만 나머지 대중들 입장에선 케이팝 수퍼스타인거죠. (R&B 팬 확장이라는) 전환율이 미미해 보이는 이유들은 그런데 있지 않을까 싶어요.
또 하나 얘기해보고 싶은 것은 '화제성' 입니다. 케이팝이나 한국힙합이나 결국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바이럴이 될 수 있었던 모멘텀들이 존재했거든요. 대표적으로 서바이벌 오디션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한국의 R&B는 그 자체로 온전히 화제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거나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봐요.
안 : R&B 로만 오디션 예능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았는데 사실 미국도 보컬의 영역으로 가면 'The Voice' 가 있지 온전히 R&B 전문 프로가 있는건 아니라서 태생적으로 포지셔닝이 애매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같은 오디션 형식이어도 넷플릭스 '리듬앤 플로우'는 랩이 메인이기 때문에 대중들 입장에서는 아 이건 힙합을 소재로 한 콘텐츠네? 로 단박에 인식이 되지만 보컬 오디션이면 장르들은 달라도 어쨋든 다 같은 '싱잉' 들이니까요.
원 : 네, '씬의 파이 확장' 이라는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고 보면 절대 다수의 대중에게 어떻게 소개되느냐가 관건이잖아요? 이 대중의 수요와 흑인음악 팬덤의 수요는 애초에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둘에게 모두 좋은 반응을 얻고 모멘텀을 획득했던게 딘, 디피알 라이브(DPR LIVE), 오프앤오프(offonoff) 같은 뮤지션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음악들을 들어보면 굉장히 절충적이거든요. 다른 장르들과 차별화해서 '나는 R&B야!' 라고 인상을 강하게 남기려는 의도가 크게 없었다고도 생각해요. 이런 요소들이 뭉쳐서 R&B 라는 씬이 타 장르 대비 선명함을 각인시키기 어렵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드네요.
2. 변화
안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변화와 성장에 대한 기대감을 주는 R&B 뮤지션들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같아요. 아직 선명하지 않다고는 해도 이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나 씬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변화의 조짐을 어렴풋이 느끼고들 있는 것 같거든요.
원 : 맞습니다. 정기고가 말했던 것처럼 그간의 한국의 R&B 씬은 좋든 싫든 힙합씬의 일부처럼 기능해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새로운 R&B 세대가 그간 봐온 한국힙합씬의 몇몇 특성들에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아 이전 세대들과는 다른 움직임들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제가 음악을 했었던 2010년대 초중반을 돌이켜보면 저희도 크루를 구성할 때 단순히 래퍼들만의 모임을 넘어 하나의 '크리에이티브 집단' 이 되고자 했었거든요? 오드퓨처(ODD FUTURE)와 에이샙 맙(A$AP MOB) 이후 많은 힙합 크루들의 구성원이 보다 다양해지고 활동들도 경계가 넓어진 것처럼 말이죠. 시선을 다시 한국으로 돌리면, 많은 크루들이 래퍼나 보컬 외에도 포토그래퍼, 영상, DJ, 비트메이커, 일러스트레이터 등 점차 다양한 크리에이터들로 구성해나가는 데에는 '자체제작에 대한 니즈' 도 컸었다고 봐요. 힙합이 쇼미더머니 덕에 부흥하고 있었다 해도 모두가 그 영향권 안에서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독립성을 위한 목적도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알앤비 뮤지션들도 보컬끼리의 만남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집단, 무리활동에 익숙해졌던 것으로 예상됩니다.
안 : 어울리는 크루의 형태가 달라지는데서 오는 특징이나 변화가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떤 것일까요?
원 : 예를 들어 최근 하이라이트 레코즈와 계약한 오웰 무드 같은 경우 Cozy Cave 라는 크루가 있잖아요? 이 크루가 단순히 R&B 보컬들끼리 만난 것이 아니라, 프로듀서, 비주얼 아티스트 등과 함께하는 크리에이티브 조직으로서 기능해왔다면 저희는 이미 오웰 무드를 한 명의 보컬리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그의 스타일과 태도 등의 아이덴티티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거나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아티스트들도 자체제작이 가능한 구조 안에서 보다 자신의 결과물에 Ownership을 가지고 임하는 경향이 늘었다고 생각해요.
안 : 그럴 수 있겠네요. 이전에는 보컬리스트 한명이 기존의 회사와 계약 후 회사의 방향성에 따라 발라드도 했다가 어반 팝도 했다가 알앤비도 살짝 시도했다가 한다면, 지금은 크루-커뮤니티 기반에서 오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커리어를 설계할 수 있는 자유도가 상대적으로 커졌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원 : 네, R&B 씬에서 감지되는 가장 큰 변화는 아티스트 개개인의 늘어난 '자유도'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향하는 음악 스펙트럼부터 크게는 커리어 설계까지 확실히 선택의 범위가 넓어졌거든요. 선배 R&B 세대들의 음악적 시도와 한국힙합씬의 성장이 만든 토양에서 이제 막 싹을 틔우는 R&B 뮤지션들이 늘어나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지금 시기가 굉장히 흥미롭기도 한데요, 이전처럼 동반성장 대상이 꼭 케이팝이 아니라 힙합 등 다른 장르여도 되는 즉 '선택지가 넓어진 시대' 같거든요.
3. 구심점
안 : 말씀주신 것처럼 지금은 새로운 세대들이 각자의 필드에서 자유롭게 커리어를 전개해가는 전환기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부는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해서 팝/케이팝의 문법 안에 R&B를 하고 있기도 하고, 누군가는 힙합씬과 적극적으로 연계해서 활동하고 있기도 하죠. 그래서 정기고가 현재 씬에 대한 아쉬움과 성장을 위해 이들이 한 데 모일 '구심점' 에 대해 언급한 것 같고요.
한 가지 드는 생각은 R&B 씬의 '구심점' 으로 꼭 더콰이엇의 '랩하우스' 같은 콘텐츠가 대안일까? 라는 점이에요. 랩과 보컬의 형식 상 차이도 그렇고, R&B 라는 장르에서 연상할 수 있는 다양한 장르들과의 연결고리 자체가 소구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다양한 캐릭터와 랩스킬들이 모인 랩 옴니버스 공연과 달리 R&B 뮤지션들만 모였을 때 타 장르 대비 콘텐츠로서의 메리트가 있을지 여러 생각이 들기도 해요.
5월 초에 접한 AOMG Quaratine Live 나 8balltown 의 스트리밍 라이브가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힙합 레이블에서 주최한 공연 콘텐츠지만 예년과 달리 참여한 R&B 뮤지션들이 특별히 비중이나 존재감 면에서 묻힌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이전에는 어느 쪽이라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애매함을 도리어 어느 쪽에도 잘 연결할 수 있는 강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타 장르의 구심점을 R&B 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거죠.
https://www.youtube.com/watch?v=LJirRCHpqFM
Hoody @ AOMG Quaratine Live (May 2020) 원 : 동의합니다. R&B 자체가 다른 장르들과의 연결고리를 통해 보다 콘텐츠가 풍성해지는 속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채널의 적극적 활용은 향후에도 중요 포인트라 생각하고, 이 풍부한 아웃풋을 시장에 잘 소개하는 것은 비단 R&B 아티스트 뿐 아니라 A&R, 공연기획자 등 주변 플레이어들의 역할도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떻게보면 씬의 자생력이라는 것은 결국 콘텐츠의 상업성을 스스로 키우고 증명할 수 있어야 지속된다 생각하거든요.
요즘 굉장히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것은 음악유통과 수익구조의 변화인데요. 예를 들어 유튜브의 KozyPop 채널을 보면 아직 인지도가 낮지만 이미 유튜브 및 SNS 에서 코어팬덤이 형성되어 있는 신인아티스트들이 공식 음원을 발표하고 상당한 수익을 얻는 사례들이 생겨나고 있어요. 정식 발매되기 전 공연 영상으로만 존재했던 백예린의 'Square' 바이럴 현상의 축소판처럼, 팬덤이 플랫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잘 응집되어 있었고요.
안 : 어떻게 보면 오프라인 공간에 구심점을 만들고 콘텐츠 기획/실행을 통한 씬의 선형적 성장을 논하는 것도 하나의 고정관념일 수 있겠네요. 시간과 공간이 해체된 이 유튜브 시대에 말이죠.
원 : 맞아요. 플랫폼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각 아티스트들의 팬덤이 개인화되면서 개개인이 미디어화 되고 각자의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경우의 수가 늘어나고 있거든요. 어쩌면 지금 시대는 R&B 씬 = 플랫폼 내 채널 현황 (콘텐츠 갯수 및 지표, 스타 유튜버 수)으로 해석되는 시대일지도 몰라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R&B 뮤지션들이 자유로운 선택으로 각자의 정체성과 Ownership이 담긴 아웃풋을 내고 오프라인에서 크루/커뮤니티 기반으로 연계하는 이 움직임들이 업계 플레이어들의 기획력으로 뉴미디어 시대의 콘텐츠로 재생산되고 효과적으로 유통된다면,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음 단계의 R&B 씬이 구축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되는데요.
여기에 어떤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것이 있어야 할지? 만약 있어야 한다면 어떤 것이 있을지? 는 저희가 좀 더 많은 R&B 뮤지션들을 만나보면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안 : 네 이제 시작이니까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Interviewer : 안승배 / Interviewee : 원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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