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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앤비 특집] 다양성의 시대: 2010년대 후반 국내 R&B 앨범 리뷰
    Review/Albums 2020. 5. 31. 18:21

    앞서 알아본 바와 같이 국내 R&B씬은 현재 변혁의 과도기를 지나 아티스트 개개인의 자유도가 커진 다양성의 시대를 맞이했다. 크러쉬, 자이언티, 딘 등의 아이코닉한 아티스트들의 등장 이후, R&B씬에는 많은 신예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이전과는 다른 DNA를 품은 채. R&B씬의 이런 변화가 본격적으로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이후부터다. 약 3년간 눈에 띄었던 앨범들을 일부 소개하며 국내 R&B씬이 변화해온 과정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2017년도

     

    히피는 집시였다 - 나무

     

    2017년 발매된 히피는 집시였다의 정규 1집은 상징적인 앨범이다. 단순히 이 앨범이 한국적인 사운드를 R&B의 영역에서 구현했다는 이유는 아니다. 그 의의를 '한국형 알앤비의 탄생'에 국한하고 싶지 않다. 이 앨범은 사운드 형식과 주제, 그리고 가사 작법에 있어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즉, 씬의 미개척지 너머로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다. 다분히 실험적인 요소가 많은 앨범임에도 리스너들은 그 가치를 믿고 그들의 손을 들어줬다. '나무'는 담고 있는 정서, 구현 방식 등 어느 하나 기존 알앤비의 틀을 따르지 않음에도 한국힙합어워즈 2017 '올해의 알앤비 앨범' 수상에 빛났다. 리스너와 아티스트 모두 이후 다가올 시대에 무의식적으로 준비되어있던 것 같았다.

     

    좌측부터 클럽 에스키모 출신 미소, offonoff, 그리고 Rad Museum의 앨범

     

    클럽 에스키모의 알앤비 아티스트 미소, 오프온오프, 라드 뮤지엄 (구. 캠퍼그래픽) 세 팀의 앨범은 알앤비의 얼터너티브, 즉 대안과도 같은 음악이다. 화려한 고음이 주되지 않은 음악. 흔히 알앤비 하면 떠올리는 기교 섞인 보컬이 주되지 않아도 듣기 좋은 대안적인 음악. 그들의 음악은 대중성과 고유의 색이란 해묵은 불균형에 휘말리지 않는다. 자기주장을 내려놓지 않고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이상적인 방식을 제시한 것. 이처럼 세련되고 잘 만든 컨텐츠가 가진 힘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그렇기에 씬의 흐름 안에서 이들이 지닌 중요도는 높다. 이후 행보는 달라졌으나 모든 구성원의 현재를 보면 클럽 에스키모라는 집단의 잠재력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후디 - 한강 (HANGANG) / 죠지 -Boat

     

    청량한 곡의 분위기와 야외 로케에서 담아낸 시원스러운 풍경, 그리고 후디의 담백한 보컬은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이유는 아마 '심플함'에 있는 게 아닐까. 대중이 요구하는 음악의 성질은 과거, 고음과 격양된 감정으로 청자를 울리는 소위 '나가수식 보컬'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곡 구성은 미니멀해지고 보컬은 자연스럽고 편안해졌다. 유행이 바뀐것이다. 시티팝을 비롯한 청량한 음악에 대한 리스너들의 수요 또한 강하게 감지되던 시기다. '한강'은 이런 시기, 가장 적절한 컨셉으로 발표되어 사랑받은 곡 중 하나다. 이렇게 발표된 많은 곡 중 또 하나의 성공사례가 바로 죠지의 'Boat'다. 화제(?)가 된 뮤직비디오와 더불어 곡자체가 가진 편안한 느낌이 정확히 먹혀든 것이다. 죠지의 음색, 유머, 실력이란 삼박자는 아티스트의 매력요소다. 유튜브 시대에 걸맞은, 현재의 대중이 원하는 모습에 가장 가까운 아티스트로 느껴진다.

     

    지바노프 - KARMA

     

    신생 레이블과 크루 기반의 활동이란 점에서 지바노프는 힙합씬의 영향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앨범의 사운드 또한 그렇다. 편안한 보컬과 트랩 리듬 비트의 조화가 돋보이기 때문. 그 스스로 힙합 문화에서 시작되었다 말하는 '크루'는 알앤비 멤버로만 꾸려져있다. 하지만 아이러닉 하게도 음악적으로 그는 옛 알앤비 OG들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묘한 조화가 차세대 알앤비 플레이어들이 받은 복합적 영향의 편린을 보여주는 듯하다. 다양한 시점의 문화에서 영향을 받고, 그것을 아티스트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 즉, 아티스트 개개인의 선택의 폭이 넓어진 다양성의 시대가 왔다.

     

    2018년도

     

    오르내림 - 전체이용가

     

    2018년은 알앤비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메시지 전달의 화법에 비약적 발전이 있던 시기이다. 이전에도 일반적이지 않은 주제를 다룸으로서 개성적인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다만 효과적이거나 정제된 결과물로 이어진 케이스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오르내림의 '전체이용가'는 이런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결과물 중 하나다. 앨범에 담긴 표현 방식은 새로웠으며 그 이상으로 캐릭터 자체의 개성이 지배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음악에 담긴 독특한 요소들 또한 기획과 의도에서 나왔다기보단 독특함을 이미 체화한 아티스트가 자연스레 도달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동심, 순수함 등의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그의 앨범 속 사운드, 주제, 창법, 가사 등 다양한 부분의 개성이 씬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수민 - Your Home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수민의 앨범. 흉내 낼 수 없는 색깔은 그녀가 표방하는 네오 케이팝 그 자체다. 수민의 경우 앞선 경우들과 달리, 음악의 분위기에 있어 조금 더 전통적인 국내 가요와 맞닿아있다. 알앤비의 영향을 흡수한 케이팝과 가요의 형식이 재차 장르 음악으로 역수입된듯한 느낌이다. 시대를 앞선 넥스트 알앤비의 사운드와 가사를 통해 넓어진 표현의 폭 또한 독보적이다. 또한, 기존의 '인디스러움'을 강조하는 양산형 알앤비의 전형을 시원하게 부수는 개성적인 음악의 전개가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Jclef - flaw, flaw

     

    제이클레프의 첫 앨범이 가진 가식 없는 매력은 리드머 리뷰와 더불어 단숨에 화제가 됐다. 그녀가 랩과 보컬을 넘나들며 노래를 끌고 가는 방식은 기존의 보컬 형식이 가진 한계를 보기 좋게 깨트렸다. 멜로디와 코드 구성의 독특함, 가사의 깊이, 독창적인 주제, 무드 등 다방면에서 빌리 아일리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전형을 거부하는 이단아이자 세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란 점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의 내적 고민을 섬세하게 밀착 묘사한 앨범의 감정선은 공감대를 사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 앨범의 화제성이 이후 알앤비 플레이어들의 음악을 평가하는 잣대 자체를 바꿨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앨범의 가치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앨범의 정서와 프로덕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갔기 때문이다. 이 논의의 시점을 앞당겼다는 점에서 세대교체의 촉매제로 작용했음을 엿볼 수 있다. 

     

    2019년도

     

    유라 - B side / 이바다 - THE OCEAN

     

    인디와 알앤비, 그리고 힙합은 오랜 기간 밀접한 관계로 얽혀있었다. 한국의 가요 특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서로 뒤섞이며 영향을 미쳤다. 장르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는 지금, 한 아티스트의 포지션은 명확히 한 카테고리에 욱여넣을 수 없다. 이바다와 유라의 앨범에는 이 뒤섞인 장르적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앤비와 인디, 그리고 싱어송라이터스러운 요소가 음악 내에 혼재되어있다. 이처럼 인디와 알앤비가 결합된 틈새의 영역은 어찌 보면 가장 한국적인 음악으로 느껴진다. 거미와 화요비 같은 아티스트들로부터 이어져온 계보의 선두주자들은 어찌 보면 여러 음악 씬과 동반 성장해온 한국 대중가요의 '지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소마 - SEIREN

     

    '왜 다른 이들이 아닌 나의 음악을 들어야 하는가?' 매일 수천곡씩 쏟아지는 음악 범람의 시대에 모든 아티스트가 품은 고민이자 필시 해결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소마는 첫 EP부터 이어진 다양한 시도 끝에 이 질문에 대한 매력적인 답을 내놓았다. 자신만의 색과 감성으로 가득한 풀 렝스 앨범으로 다채로운 자신의 음악을 증명한 것이다. 퇴폐적인 매력부터 어린아이 같은 매력, 그리고 서정적인 매력까지 자유자재로 구현해낸다. 앨범 곳곳에 서린 힙합적인 태도 또한 재미 요소이며 그녀가 지닌 복합적 매력의 한 층으로 기능한다. 태도뿐 아니라 구성적으로도 힙합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지점은 유기적이고 다채로운 앨범의 스토리텔링이다. 이는 알앤비와 가요 앨범의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으며 소마의 앨범이 '장르 음악'으로 명확히 느껴지는 이유다. 알앤비와 힙합의 커뮤니티가 동반 성장하며 남은 일종의 흔적을 소마의 앨범에서 명확히 발견할 수 있다.

     

    Paul Blanco - Lake of Fire

     

    폴 블랑코의 음악, 캐릭터, 그리고 보컬과 래퍼로서의 포지션은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새롭다. Fresh 하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개성있는 보컬, 실력 있는 래퍼 두 포지션을 꿰차는 설득력은 어딘가 다른 바이브에서 나온다. 이 바이브는 분명 기존의 한국 힙합에 존재하던 느낌이 아니다. 오히려 본토의 바이브가 먼저 학습된 폴이 이를 한국 힙합/알앤비에 수혈했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아직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가지고 있는 재능의 크기가 여실히 느껴지는 유망주. 장르 구분이 사라지며 랩과 알앤비를 동시에 구사하는 하이브리드형 아티스트들이 많아진 지금, 단연 앞서있는 대표주자인 그에게 큰 기대를 걸 수 있다.

     

    dress, sogumm - Not my fault

     

    사실 국내 알앤비의 실험성, 독창성을 논할 때 소금을 제외할 수 없다. 그녀를 비롯한 많은 보컬들이 노래에 로우(raw)한 느낌을 담아내는데 도전했으나 가장 두각을 드러낸것은 소금 한 명이다.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든 특유의 창법은 알앤비/소울로 단순히 규정하기 쉽지않다. 그럼에도 박재범과 함께 한 '궁금해', 사인히어에서 선보인 '큰 꿈' 등 곡에는 대중성이 담겨있다. 색다르지만 분명 이질적인 영역 밖으로 완전히 나가있는 느낌은 아니다. 이런 숨겨진 스타성이 AOMG라는 레이블을 만나 상업성, 즉 범대중적 가치를 인정 받을 때 씬은 확장하고 힘을 가진다. 대중과의 눈치게임, 그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 그녀의 음악에 설득력을 부여할지가 소금이 앞으로 증명해가야 할 과제이다.



    2020년도

     

    2020년의 기대주라 할 수 있는 빅나티, 오션프롬더블루, 그리고 드비타 등

     

    한국의 알앤비는 오랜 시간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케이팝, 인디 등 대중가요의 일부로 기능하던 알앤비는 최근 몇 년 사이 힙합과 동반성장하며 그 영향을 흡수했다. 그러나 국힙상담소에서 정기고가 던진 아젠다, 즉“알앤비 씬은 힙합씬에 비해 상대적으로 흐릿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상기해야 할 문제의식이다. 이와 반대로 현재 씬의 아티스트 로스터를 떠올려보자. 시대가 바뀌고 플랫폼이 바뀌면서 아티스트들이 영향을 받는 소스(source)가 바뀌었다. 지금은 그 어느때보다 다양한 알앤비가 시장에 존재하는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다.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재능과 가능성을 품고 수면 아래에서 서서히 끓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이 있다.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알앤비 씬의 실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스운 이야기지만, 어쩌면 지금 시대의 기준에서 음악씬의 크기를 나타내는 지표는 유튜브 컨텐츠 개수가 아닐까 싶다. 비약하자면 알앤비씬은 딩고 프리스타일 '킬링 보이스' 시리즈에 있고 AOMG의 Quarantine 세션에 있으며 아이콘TV에 있다. 최근 진행된 'R&B Island' 또한 가시적인 씬의 형태다. 즉, 대중이 매력을 느끼고 알앤비를 소비할 수 있는 모든 구좌에 알앤비 씬은 존재하고 있다. 다만 이 산발적 구조 안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것은 결국 문화다. 힙합 문화가 오랜 시간 고유의 패밀리쉽을 유지하며 이어져왔던 것 처럼.

    알앤비 씬은 이미 다양한 문화를 체화해 자신들의 그라운드를 만들어가는 신예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피를 수혈받고있다. 한국의 알앤비가 매력적으로 익어가는 만큼 알앤비 씬의 윤곽 또한 조금씩 선명해져간다. 한국의 알앤비는 이제 더이상 장르가 아니다. 이는 문화인 움직임이자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라이프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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