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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미 이후의 시대, 한국힙합이 느끼는 불안감Feature/힙합과 한국 2019. 11. 12. 16:03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가 시작된다. 출근길 음악을 위해 스트리밍 앱을 켰을 때 보이는 건 유명한 래퍼의 플레이리스트. 많은 ‘좋아요’를 얻은 이 리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건 물론 힙합이다. 부서 회의에 가니 요즘 트렌드로 래퍼들이 출연한 뉴미디어 콘텐츠가 화제란다. 엊그제 회식에선 래퍼가 되고 싶어하는 아들에 대한 부장님의 고민을 자정까지 들었다. 이것이 래퍼 화나가 13년전 싱글 ‘그 날이 오면’에서 간절히 바랐던 시간일까 싶다. 힙합이 대중화를 넘어 내 일상 곳곳에도 연결된(듯한) 시대.
일상 속 체감과 달리 요즘의 한국힙합 씬에서는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힙합계의 대표적 상반기 공연 콘텐츠 ‘일리앰비션 서울 투어’가 기대 이하의 예매율을 보인 상황이 그 예다. 당시 댓글들 중 눈에 띄는 의견들이 있었다. 이들의 공연은 이미 ‘연결고리’ 시절부터 충분히 봐왔다는 평들. 한마디로 질렸다는 얘기다. 이 반응은 7월 말 방영을 시작해 9월 초 종영한 ‘쇼미더머니8’에게도 일치한다. 시작전부터 ‘나올 사람은 이미 다 나왔다’는 평이 지배적이던 커뮤니티 분위기에 이어 역대 최저의 음원성적을 기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힙합의 대중화에 대한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줄어든 신선도로 인한 팬들의 이탈 현상을 우려해야 할 판이다.
2010년대 힙합씬을 일궜다 평가받는 선구자들은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박재범은 은퇴를 언급하며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고자 지속적으로 인재를 영입한다. 더콰이엇은 공연 브랜드 ‘랩하우스’ 와 네이버 나우 앱의 라디오 코너 ‘랩하우스 온에어’ 병행을 통해 베테랑 래퍼와 신인 래퍼가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팔로알토는 유튜브 콘텐츠 ‘P2P’를 진행하며 신인들의 작업물을 모니터링하고 피드백을 준다. 메인 플레이어로서 한 발 빼는 대신 다음세대를 위한 자리를 그리는 모습들이다. 그에 맞게 이들이 운영하는 레이블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신인 영입에 적극적이다.
래퍼/프로듀서 더 콰이엇이 직접 기획/운영하는 공연 브랜드 '랩 하우스' (Rap House) 하지만 이상 신호를 통해 생겨난 불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차세대 기대주’로서 영입된 각 레이블의 신예들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보면 더욱 그렇다. 하이어뮤직의 김하온부터 VMC의 이로한까지. 물론 이들만이 다음세대를 대표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힙합 오디션 지원자가 1만 3천명을 돌파한 시대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주요 힙합 레이블의 신입 사원이 된 래퍼들이다. 이들을 선택한 주요 레이블 대표들이 보다 디렉터 역할에 충실할수록, 레이블 루키들의 활동은 다음세대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구조일 것이다. 이들의 퍼포먼스를 검색해보면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은 ‘고등래퍼’ 시절을 믹스한 영상이다. 설익었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더해진 시기에 부응하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스윙스의 심사평처럼 아직 ‘형’이 필요한 친구들이다.
고등래퍼2 파이널 무대에 진출했던 래퍼 5인. 방송에서의 활약 이후 대부분 주요 한국힙합 레이블과 계약했다. 좌측부터 이로한(Rohan/VMC), 이병재(VINXEN/로맨틱팩토리), 윤진영(ASH ISLAND/앰비션뮤직), 김하온(HAON/하이어뮤직), 조원우(Jowonwu/하이라이트) 사실 지금의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 래퍼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모바일 기반 플랫폼의 영향력이 나날이 증대하는 현재, 래퍼들이 자신의 음악을 프로모션할 수 있는 매체와 콘텐츠는 다양하다. 아이돌 음악/영상 전문 유튜브 채널이었던 1theK의 ‘1theK Originals’나, 음악스트리밍 앱의 장르 매거진 및 오디오 콘텐츠 개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음악매체/플랫폼은 오리지널 콘텐츠 확보를 위해 기존의 아이돌 팬덤향 콘텐츠를 넘어 한국힙합에 대한 관심을 지속 확장해가고 있다. 이미 멜론 스타DJ, 아프리카TV와 엠넷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수퍼비처럼 자신의 캐릭터와 콘텐츠가 확실하다면 오히려 예전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힙합이 대중 속에서 소비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이 갖춰진 제반조건을 다음 세대 래퍼들이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조금 더 솔직해져보자. 박재범과 더콰이엇 같은 ‘형’ 들없이, 이들 만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음악과 콘텐츠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자신 있게 나오지 않는 이상 한국힙합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쇼미더머니’ 없이도 성공했다 하여 화제가 되는 염따와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에게로 돌아가보자. 이들의 이슈메이킹 능력보다 먼저 조명되어야 할 것은 이들의 음악 속에서 보여지는 ‘장악력’이다.
다양한 게스트의 참여 속에서도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 평가받는 염따의 정규3집 '살아숨셔2' 수록곡 M/V 스틸컷 염따의 정규앨범은 소위 말하는 스타 프로듀서들의 참여가 없다. 고유의 사운드 아이덴티티를 위해 본인이 직접 곡을 만들거나 눈여겨본 신진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하며, 인지도 있는 래퍼들과 함께 하더라도 자신의 기획 의도를 잘 살릴 수 있는 선에서 기용한다. 많은 레이블들이 주목했던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의 2018년 데뷔 EP 역시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 속 개그 동영상 만큼이나 깊이 각인된 것은 동료 폴 블랑코와 함께 보여준 음악적 존재감이다. 이미 견고했던 그만의 캐릭터와 사운드가 바탕이 되어, 박재범/오케이션과 작업을 해도 주도권을 잃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미 뿌리를 내린 기존의 힙합 레이블 체계에서는 참고하기 어려운 사례일까? 나는 前 인디고뮤직의 재키와이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딩고와 협업하여 발매했던 인디고뮤직의 히트 싱글 ‘띵’을 기억해보자. 기리보이의 프로듀싱에 저스트뮤직/인디고뮤직 의 래퍼들이 고루 참여한 곡이지만, 유튜브에서는 재키와이의 ‘띵’으로 검색되고 있다. 이는 그녀가 스타 프로듀서나 래퍼 없이 자신의 색깔을 오롯이 담아낸 정규앨범을 레이블에서 발매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여 구축한 탄탄한 팬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쩌면 지금의 한국힙합이 가진 다음에 대한 고민은 미래를 이끌어갈 신예들이 좀 더 자기 색깔로 팬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루비룸의 비트나 팔로알토의 피처링이 없는 김하온과 조원우의 캐릭터와 음악적 방향성이 궁금하다.
Written by 안승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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