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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미더머니, 그리고 더 나은 세계Feature/힙합과 한국 2019. 12. 8. 02:31
스톤뮤직 주관 '국힙상담소'의 호스트 팔로알토 & 더콰이엇 쇼미더머니라는 문구와 힙합의 연결고리가 처음 생겼던 순간이 떠오른다.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치트키로만 익숙했던 문장이 제목으로 쓰인 요상한 힙합 오디션 프로. 2012년 6월, 그 첫 방송 이후 벌써 7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영원히 나만 몰래 알 것 같았던 힙합 음악과 라이프스타일은 이제 무려 어린 학생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대중의 반응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멜론 차트에서도 힙합 트랙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는 세상이다. 이렇듯 한국 힙합은 지난 몇 년간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분명 이는 모두가 달가워한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지금은 다음 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이니 말이다.
쇼미더머니는 늘 특유의 자극적인 편집으로 악명이 높았다. 오로지 예능만을 위한 소재로 래퍼들과 힙합을 소비하는 쇼미더머니의 태도는 분명 건강하진 않았다. 예를 들어, 최근 방영된 쇼미더머니 8에서 넋업샨은 다분히 의도적인 연출로 ‘시즌 2의 우승자’에서 시대에 뒤처진 퇴물로 그려졌다. 꾸준히 반복돼 그려지는 기성 래퍼들의 추락은 분명 불쾌한 뒷맛이 남는다. 그럼에도 쇼미더머니의 역할이 대중에게 힙합을 소개하는 가장 큰 미디어임은 부정할 수 없다. 시즌 8의 머쉬베놈, 안병웅, 짱유 등이 방송 후 받는 대중적 관심은 쉽사리 상상할 수 없던 광경이다. 미디어로서 쇼미더머니의 영향력은 양날의 검처럼 기성 래퍼들에겐 피해를, 덜 유명했던 래퍼들에겐 기회를 제공했다.
네이버 나우 주관 '랩하우스 온에어'에 출연한 머쉬베놈
그렇다면 쇼미더머니가 대중에게 제공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힙합과 랩에 대한 기준이다. 래퍼가 래퍼를 평가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특성상, 자연스레 시청자는 지속적으로 심사평을 통해 실력과 멋을 학습한다. 시즌 2의 아웃사이더와 시즌 3의 육지담의 ‘20만 원’과 ‘힙합밀당녀’ 사건은 대중에게 외면받았고 시즌 8의 안병웅의 이른 탈락은 시청자들을 분노케 했다. 랩 실력에 대한 시청자들의 판단 기준은 시즌을 거듭하며 정교해졌으며 이제 그들은 명확한 취향을 바탕으로 래퍼들의 실력을 판가름한다.
이토록 일반 대중에게 힙합의 이해도가 상승했다는 점은 다른 지표로도 드러난다. 최근 음원 차트의 동향에서 감지되는 꽤 인상적인 변화가 있다. 과거 선호되던 음원은 주로 감성적인 랩 발라드 위주의 곡들이었으나 현재는 강렬한 랩과 중독성 있는 훅이 주가 되는 곡들이 관심을 받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인 앰비션뮤직의 “BAND”는 멜론차트에서 굉장히 오랜 기간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며 이는 괄목할만한 변화다. 소위 ‘랩다운 랩’의 차트파워가 곧 수치로 증명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앰비션뮤직의 'BAND'가 보여주는 차트파워 (2019.07) BAND의 10월 차트. 7~10월까지 약 30위권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출처: 케이팝차트 쇼미더머니 8에 참가한 많은 어린 래퍼들은 전 시즌들의 출연자에게 멋을 느껴 랩을 시작했다고 한다. BIG Naughty (서동현) 처럼 익숙한 랩의 전형과는 다른 새로운 개성을 보여주는 래퍼들이 있다는 것은 나름 쇼미더머니의 선순환이다. 세대를 거듭하며 발전해나가는 신예들은 결과적으로 씬을 풍족하게 만드는 자산이다. 또한, 힙합을 1차원적인 요소, 즉 반항적인 언행 등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본격적인 삶의 태도로 자연스레 습득한 신인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삶의 태도로서의 힙합을 통해 영감을 얻어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가 클 것이다.
방송 사업으로서 이윤을 좇는 쇼미더머니와 힙합 문화의 본질적 정체성은 결국 어느 지점에선가는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어있다. 이 충돌에 많은 래퍼들이 희생되었음에도 쇼미더머니를 대체할 미디어의 부재는 여전히 성공에 목마른 젊은 래퍼들을 숨 막히는 레드오션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그렇다면 쇼미더머니는 이 씬에서 ‘악’으로 규정되어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쇼미더머니는 자연 현상처럼 불쑥 힙합의 성장 과정에 끼어들었을 뿐이다. 좋건 싫건, 쇼미더머니 또한 힙합씬과 부대끼며 동반성장 해온 것이 아닐까 싶다. 분명한 것은 아직은 쇼미더머니만이 할 수 있는 필수적인 역할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쇼미더머니의 등장 이래, 한국 힙합과 쇼미더머니의 피할 수 없었던 7년간의 한집살이. 이젠 과연 쇼미더머니를 걷어냈을 때의 한국 힙합씬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힘은 과연 어느 정도 인지를 명확히 인지해야 할 때다. 당장의 현재만 짚어보아도 신인 래퍼들의 등용문이 되어줄 창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다. 채널 하나하나가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소개의 장만으로는 아직 숨은 신인들의 커리어를 반듯하게 그려줄 탄탄한 구조가 완성되었다 보기 어렵다. 쇼미더머니가 없어도 래퍼들이 성공을 꿈꿀 수 있는 씬을 만들어가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시급한 과제다.
나에겐 최근 ‘P&Q의 국힙상담소’ 에서 더 콰이엇이 오왼 오바도즈에게 건넨 “완벽한 세계를 꿈꾸지 말고 더 나은 세계를 꿈꾸라”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쇼미더머니가 개입한 과거는 바뀔 수 없고 지금 우리가 맞이한 현재는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필연적 결과물이다. 물론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 현재를 비관하며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서의 최선을 찾아 나아가면 조금씩 실질적인 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작은 행동이 변화를 부르고 변화는 결과적으로 발전을 부르기 마련이다. 쇼미더머니로부터 얻은 영향력을 잃지 않되, 그 영향력을 온전히 씬의 힘으로 돌리는 것. 그리고 그 힘을 토대로 씬이 자생 할 수 있는 구조를 조금씩 마련해가는 것. 나는 그것이 더 콰이엇이 말한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방법일 것이라 믿는다.
Written by Vapizz (원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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